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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조 이성계 그는 왜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하였나?
    역사 2023. 3. 22. 17:50

    조선의 건국은 1392년에 성공한 이성계(李成桂)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성계는 고려 말기에 왕실과 귀족 사이의 갈등과 외국 침략 등으로 인해 권력을 잡아먹으며 국가 위기를 직면하고 있던 상황에서 정치적 혼란을 진압하고 왕위를 잡았습니다.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신분이 낮은 백성 출신인 자신의 친족을 임금의 고위 관직에 임명하고, 고려시대부터 유지되어온 가문제도를 개혁하여 세습된 권력과 지위를 규제하였습니다. 또한, 새로운 왕조를 세우면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서울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습니다.

    이성계는 또한, 중국의 장안(長安)과 베트남의 한국(漢越) 등을 모델로 하여 조선의 행정 체계를 수립하였습니다. 그는 전국을 8도와 5부로 나누어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지방 관리를 위해 지사와 현감을 임명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선의 행정 체계는 대부분의 조선 왕조 시대에 이어져서 사용되었으며, 한국의 행정 체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성계는 신분이 낮은 백성들도 합리적인 조건으로 군역을 면제할 수 있도록 군역제도를 개혁하였으며, 새로운 사법제도를 도입하여 법의 평등을 실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건국에 성공하였으며, 그 이후로 500여 년 동안 조선 왕조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 정몽주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도모했다. 그리고 성리학에도 밝아 《주자가례()》에 따라 사회 윤리의 기반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에는 고려의 기존 법률 체계와 원나라의 법률, 1367년에 새로 제정된 《대명률()》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신율()》을 편찬해 고려의 법률 체계를 재정비하려 했다. 나아가 외교와 군사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정도전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 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도전 [鄭道傳] - 새 왕조 조선의 설계자 (인물한국사, 이근호, 장선환)

    * 조선의 3대왕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1335년 ~ 1408년)은 조선의 제3대 왕으로, 조선시대 초기를 이끌었습니다.

    태종은 고려 말기에 당나라의 침입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서, 이후에 무신정변에 참여하여 권력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조선시대의 중심인 환골타당(換骨奪権)이라는 정치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환골타당은 공신이 아닌 평민 출신의 자신과 같은 출신의 인재를 권력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태종은 중앙 집권화를 이루고 효율적인 정치 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또한, 태종은 국방 강화와 경제 발전에도 노력하였습니다. 국내 농업과 상업을 발전시키고, 외교와 상업을 통해 외국과의 관계를 다지면서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데 기여하였습니다. 태종은 또한 왕권의 힘을 강화하고, 관료 제도를 완성하여 조선시대의 국가체제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 왕자의 난

    1398년(태조 7) 8월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을 방원(芳遠:태종)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의 난, 또는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 하고 1400년(정종 2) 1월에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을 방간(芳幹)의 난 또는 박포(朴苞)의 난이라고도 한다.태조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와의 사이에 방우(芳雨)·방과(芳果:정종)·방원 등 여섯 형제를 두었고,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와의 사이에 방번(芳蕃)·방석(芳碩)을 두었다. 난의 발단은 태조의 후계자 책정에 있었다. 태조는 첫째부인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반발함에도 불구하고 총애하던 강씨 소생의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한씨 소생 왕자들은 이를 못마땅해 했고, 특히 정몽주를 비롯한 개국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왕대비 안씨(安氏)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케 하는 등 조선건국에 큰 역할을 했던 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다. 조선 건국의 최대 공신(功臣)인 정도전·남은(南誾) 등이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 유교(儒敎)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왕실 권력의 기반인 사병(私兵)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방원은 한씨 소생 왕자들과 함께 1398년(무인년) 8월 25일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河崙)·이거이(李居易) 등 방원의 심복들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한 방원의 뜻에 따라 둘째인 방과가 세자가 되었는데 이가 곧 정종(定宗)이다.이후 정종과 그의 정비 정안왕후(定安王后) 사이에 소생이 없자, 세자의 지위를 놓고 방원과 방간(회안대군)은 또다시 미묘한 갈등에 싸였다. 이때 공신 책정문제로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방간을 충동질하여 1400년 1월 방원과 방간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개경에서 벌어진 싸움은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이후 지위가 확고해진 방원은 1400년(정종 2)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太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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